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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가우처    |  가우처  | 존 가우처
 
1845년 6월 7일 펜실베이니아 웨인스보로에서 태어나 1868년 딕킨슨 대학을 졸업한 가우처는 14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1869년 감리교 목회자가 되었으며, 1877년 12월 24일 메리 존 가우처 세실리아 피셔(1850~1902)와 결혼했다.
20년 이상 볼티모어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했고, 러브리 레인 감리교회에 있을 때 미 서부지역에 175개의 교회 건축을 위한 재정을 지원했으며, 중국 · 인도 · 일본 · 한국 등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 1885년 볼티모어에 여자대학을 세웠고, 1890~1908년까지 이 학교의 제2대 총장으로 재직했다. 1922년 7월 19일 운명했다.
그는 조선의 기독교 선교와 고등교육의 모태를 제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가우처의 한국선교 인연은 1883년 9월 고종황제가 파견한 미 외교사절단을 기차(샌프란시스코→시카고→워싱턴) 안에서 만나면서부터였다.
이후 조선 외교사절단을 볼티모어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한국에 대한 정보를 청취한 그는 1884년 친구 로버트 맥클레이와 그의 아내를 조선으로 보내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도록 일체 경비를 지원했다. 1884년 6월, 가우처의 부탁을 받은 맥클레이는 외교부 주사 김옥균의 주선으로 고종을 알현하고 '학교'와 '병원' 사역에 대한 윤허를 얻어냈다. 한국선교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후 가우처는 6번에 걸쳐 조선을 방문했으며, 배재학당 · 이화학당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미감리교 선교부에 2000불 헌금함으로 초기선교 자금을 뒷받침했고, 이후 3000불을 더 헌금해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의 대지를 구입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연세대학교 전신인 조선기독교대학 등에 재정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가우처는 아시아지역의 선교와 교육을 위한 지원을 이어나갔다. 1883년 일본 청산학원대학 지원하는 한편 북인도에 60개 가우처 학교를 세워 최하위계층 어린이, 기독교와 타종교(힌두교, 회교)어린이, 그리고 여자에게도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1880년 중국 복주에 신학과를 개설했고, 천진에 여성병원을 개원하는 일과 청도에 화서연합대학을 설립하는데 협력했다.
 
(그는 6번 조선을 방문했으며, 배재학당 · 이화학당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차 방문 1907616-621: 조선선교연회 참석 발언, 대부흥운동에 관해 들음.
2차 방문 1910“1027일에 한국을 향해 떠났다.”에서 일기가 끊어짐.
3차 방문 19131024-111: 서울, 평양, 송도 등을 방문하고 헤이그로 떠남.
4차 방문 1915417-21: 한국/
1915517: 59일 엘리스 아펜젤러는 가우처의 재정적 지원에 감사편지
5차 방문 1919116-11: 평양 새 고등학교 건물 정초식(남학생기숙사 불)
1920218-20: 배재, 연희전문학교부지 답사, 여자대학 부지구입.
6차 방문 19201019-29: 미국 주일학교대표 50명이 배재 및 연희전문학교 방문
이화방문, 아펜젤러 홀 현판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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