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소개
+
인사말
기념관소개
관람안내
기념관앨범
주변성지
오시는길
아펜젤러
+
아펜젤러의 약력
아펜젤러 앨범
아펜젤러동영상
한국선교사 파송
성경번역/교육선교
교회설립/지역선교
문서선교
독립협회
가우처
+
존 가우처
전시시설안내
+
전시실전도
주전시실(B1층)
특별전시실(1층)
파송선교관(2층)
전망시설(3층)
가우처 홀
알림/참여
+
공지사항
기념관행사일정
자유게시판
방문후기앨범
선교뉴스
샬롬토크(방명록)
후원회원신청
방문예약/확인
+
방문예약/신청
아이디
비밀번호
로그인
자동로그인
아이디/비밀번호 찾기
회원가입
검색
전체 최근 게시물
기념관소개
인사말
기념관소개
관람안내
기념관앨범
주변성지
오시는길
아펜젤러
아펜젤러의 약력
아펜젤러 앨범
아펜젤러동영상
한국선교사 파송
성경번역/교육선교
교회설립/지역선교
문서선교
독립협회
가우처
존 가우처
전시시설안내
전시실전도
주전시실(B1층)
특별전시실(1층)
파송선교관(2층)
전망시설(3층)
가우처 홀
알림/참여
공지사항
기념관행사일정
자유게시판
방문후기앨범
선교뉴스
샬롬토크(방명록)
후원회원신청
방문예약/확인
방문예약/신청
Appenzeller Memorial Mission Hall
Henry Gerhard Appenzell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우리는 부활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K.M.C MISSION HISTORY HALL
Previous
Next
아펜젤러의 약력
아펜젤러 앨범
아펜젤러동영상
한국선교사 파송
성경번역/교육선교
교회설립/지역선교
문서선교
독립협회
독립협회
"
아펜젤러와 서재필
의
독립협회
"
독립문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중 1895년 12월 귀국한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집에 머물면서 배재학당 교사로 활동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와 세민 대중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목도한 아펜젤러는, 복음과 교육을 통해 육성된 인재들이 부패한 봉건 사회를 바꾸어 나가도록 힘쓰고 있었고, 1884년 갑신정변 후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한 서재필은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렇듯 서재필과 뜻이 맞은 아펜젤러는 그를 지원했다.
서재필은 한글로 된 「독립신문」(1896. 4 ~ 1899. 12)과 영문판 The Independent를 창간하고,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감가진 등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였다. 독립협회는 굴욕적인 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1896년 독립문을 세웠으며, 토론회, 구국상소,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세민 대중의 계몽과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한편, 독립문 기공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은 「조선가」와 「독립가」를 불렀고, 아펜젤러는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에서 러시아 고문단 철수를 요구한 서재필은 친러 정권과의 대립으로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영은문
독립신문 창간호
1898년 8월 17일 아펜젤러가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에는 「독립신문 편집에 대한 의견」이 적혀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나와 서재필 박사 간에 맺은 협정 조항에는 독립 신문의 영문판 및 한글판 경영에 대한 권한을 박사(서재필)의 부재 기간 동안 내게(아펜젤러) 위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다. 아펜젤러는 그러면서 이 권한을 윤치호에게 양도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서재필이 미국으로 간 후, 독립신문의 실질적 책임자는 아펜젤러였던 것이다.
아펜젤러는 독립협회, 독립신문, 배재학당을 통해 서재필, 윤치호, 김가진, 이승만 등과 교류하면서 이 민족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던 것이다.
독립회관과 청중
독립협회의 본부 독립회관
독립운동 강연을 들으러 모인 청중
"
이승만
과
아펜젤러
"
이승만과 투옥 인사. 왼쪽부터 이상재, 김정식, 이승만, 유성준, 이원긍, 이승인(이상재의 아들). 이들은 옥중에서 개종하였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이듬해 8월에 졸업하고 그곳의 영어 교사가 된 이승만은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만민공동회를 주도했다. 또한 협성회보(報)의 주필로서 정부를 매섭게 비판하던 그는 정부 전복 혐의로 1898년 종신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당시 아펜젤러는 이승만은 물론 그의 아버지 이경선과 가족까지 돌보았다. 1899년 성탄절, 아펜젤러는 옥중에 있는 그에게 친구를 보내 선물을 전달했는데, 이에 대해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서양력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인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날이 성탄절인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이 편지를 귀한 선물 대신 새해 인사까지 겸한 성탄절 선물로 여기고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값비싼 담요와 쌀, 그리고 땔감 등을 보내주신 데 대해 어떤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저와 같이 비참하고 죄 많은 몸을 감옥에 갇혀 있는 가망 없는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고, 더욱이 의지할 데 없는 제 가족에게 먹고 살아갈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펜젤러의 교육은 지식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데까지 나아갔다.
아펜젤러
아펜젤러의 약력
아펜젤러 앨범
아펜젤러동영상
한국선교사 파송
성경번역/교육선교
교회설립/지역선교
문서선교
독립협회